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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베뢰아의 귀신론을 비판한다. (11) 조회수 : 861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3-04-01
7.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음부가 무저갱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12) 베뢰아 측의 잘못된 성경해석 - 음부의 권세에 대하여
  베뢰아 측이 주장하는 단 한 가지 성경구절은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 위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6-18)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음부는 곧 세상이다.’ 라고 해석을 합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세운 교회를 음부가 이기지 못하리라 했으면 그러한 해석이 가능할 법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곧 마귀의 권세를 말합니다. 음부가 무슨 권세가 있습니까? 음부는 죽은 자의 영을 가두는 특별한 장소일 뿐 그 자체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음부에 가게 되는 것입니까? 음부에 가게 되는 사람들은 마귀의 거짓에 속아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배반한 자들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부라는 장소가 따로 있는데 그 장소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마귀의 종노릇한 자들을 가두어 두기 위한 장소이며 그러므로 이 장소에 가게 되는 것은 모두가 마귀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러므로 마귀에게 사람이 죄 짓고 죽어서 음부에 가게 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① 음부의 권세는 마귀의 권세를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한 세상 신 마귀의 권세를 다른 말로 음부의 권세 혹은 사망 권세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베뢰아 사람은 확대 해석하여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했지 않느냐? 그러므로 ‘교회가 세워진 세상이 음부다’라고 되지 않은 억지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세상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사람 중에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법을 잘 지키고 사는 사람도 있고 남을 해치는 죄를 범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임시구치소에 영치해 두었다가 죄가 확정되면 교도소로 보냅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보면 생활하던 중에 본의 아니게 실수로 범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직적으로 범죄한 사람도 있습니다. 조직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을 보면 그 두목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부하들을 명령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두목 혹은 오야지 혹은 보스라고도 합니다. 죄를 짓다가 잡히면 형을 받고 교도소로 갑니다.
 
② 깡패두목과 교도소와 세상은 다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짓 짓고 다니는 세상을 교도소라고 하지 않습니다. 죄 짓게 된 것은 두목의 명령에 의해서입니다. 두목이 죄를 지으라고 명령을 해서 이 사람은 두목의 명령 때문에 죄 짓고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교도소에 가게 된 것은 결국 두목의 명령 때문입니다. 두목의 명령을 수행하다가 교도소에 가게 되니 죄 지으라고 명령한 그 두목을 교도소라고 하지 않습니다. 죄 지으면 교도소에 갈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죄 지으라고 명령합니다. 부하는 두목의 명에 의하여 죄 짓고 교도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교도소에 가게 된 것은 전적으로 두목의 명령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목의 명령 때문에 교도소에 가게 되었으니 두목이 교도소이며 죄를 지은 세상이 교도소냐 하는 것입니다.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13) 음부의 권세가 의미하는 것 - 베뢰아 측의 잘못된 주장
  마귀는 사람을 짓 짓고 음부에 들어가게 하는 명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가 사람으로 하여금 죄 짓고 음부에 들어가게 하는 이 권세 이것을 음부의 권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음부에 가도록 죄를 짓게 하는 장소는 세상이요 죄를 짓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사람이요 그 죄로 말미암아 가게 되는 곳은 음부라는 것입니다.
 
깡패두목과 세상과 교도소
  사실이 이러함에도 베뢰아 측이 계속해서 세상을 음부라고 주장하면 깡패두목에 의해서 죄 짓고 그 죄 때문에 재판받고 교도소 가게 됐는데 세상 사람들이 교도소에 대해서 말하기를 깡패두목도 교도소고 두목이 명령해서 죄 지은 세상도 교도소고 재판받고 갇혀 있는 곳도 교도소라고 한다면 이런 혼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베뢰아 측은 이러한 주장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하면서 그것이 옳으니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어떤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언어에 대한 정의는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던지 적당히 하신 것이 없습니다. 하나하나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하시며 사람이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분명하게 해 놓으신 것을 잘 알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이해의 범주밖에 있거나 아니면 자기 생각으로 정리하여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4) 잘못된 주장은 마귀적 이론을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이해할 때 있어서 음부와 무저갱과 지옥과 세상에 대한 이해는 성경에 기록한 대로 분명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모든 것에 대한 이해와 행위를 원칙대로 하는 것이 아니요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적당히 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가르치는 논리의 핵심은 너무 구별하지 말고 적당히 하며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이러한 마귀의 이론이 침투하여 많은 혼란이 일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예리하고 분명하며 확실하고 정확해서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알아서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때에 이렇게 사는 자의 삶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5) 마귀의 가르침 핵심은 사람 좋을 대로 하는 것
  상대적으로 마귀의 가르침은 따지고 분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를 이루는 것의 핵심은 만상의 이치가 하나인 것을 알면 도를 이룬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빛과 어둠이 같고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같으며 악한 것과 선한 것이 같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이 같으며 모든 현상이 무엇을 보더라도 그 이치가 하나인 것을 알면 그것이 도에 이르는 것이니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마음을 잘 관리해서 모든 이치가 둥글고 하나인 것을 깨달으라고 합니다. 선방에서 참선한다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고요함 속에서 분별없이 하나된 것을 알면 마음속에 갈등이 없어지고 참 평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원리인 것입니다.
 
16) 불교의 핵심교리 -반야심경(般若心經)
  그러므로 그들이 날마다 반복하는 염불의 가장 중요한 것인 반야심경은 그러한 이치를 집중애서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이를 번역하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고 하는데 마하(摩訶)라는 것은 크다는 뜻이며 반야(般若)라는 것은 지혜를 말하는 것이며 바라밀(波羅蜜)은 도피안 이는 저 언덕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성불, 해탈, 열반, 극락 등을 가리켜 하는 말이요 심경(心經)이라 함은 마음의 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정리하면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마음의 경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반야심경이 해탈의 방법, 성불의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으며 가르쳐준 대로 되면 그것이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침투한 우상 숭배적 요소
  귀신에 대해서 말하면서 불교의 경전을 꼬집어 내는 것은 기독교에 우상숭배적 요소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들어와 있으며 이러한 것들이 작용을 해서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나오고 잘못된 해석이 나오고 이단이 나와서 기독교의 본질이 훼손된 체 양신이 역사하는 가운데 좋다 좋다하는 혼합된 복음주의자들이 의외로 많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다음으로 보면 觀自在菩薩 行心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舍利子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사리자’라고 하는데 이는 수행자가 오온이 다 텅빈 것과 일체고액이 텅 빈 것을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온’이라 함은 色受想行識을 말하며 ‘일체고액’이라 함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닥치게 되는 모든 고통을 말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하면 色은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하며 受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며 想이란 마음속에 받아들인 것을 생각하는 것을 말하며 行이라는 것은 생각한 것을 행동하는 것을 말하며 識이라는 것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의 전체에 대한 인식 곧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인식을 말하며 일체고액이란 이렇게 오온의 활동을 하는 중에 닥치게 되는 일체의 고통을 말하며 ‘개공도’라 함은 이러한 모든 것이 허공과 같아서 아무 것도 아니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마음속에 정리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17) 기독교의 핵심교리와 불교의 다른 점
 
① 기독교는 확실하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진리와 불교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만든 피조세계가 있고 그 중심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사람이 있고 사람을 유혹하여 죄 짓게 하는 마귀의 세력 용이 있고 죄에서 구원해줄 수 있는 구세주 예수님이 있고 믿으면 가는 천국이 있고 예수 안 믿으면 가게 되는 지옥이 분명하게 있으니 이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② 불교의 교리는 기독교와 정반대이다.
  그런데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일체의 것이 없는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일체의 걸림이 없음을 깨달아 알면 해탈을 하고 열반에 들어간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깊이 들어가면 결과적으로 이들이 노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 불로 끌고 들어가는 것을 그들 가르침의 핵심원리로 삼고 있음을 ‘시조견오온개공도 일체고액사리자’라는 염불 속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③ 불교의 교리는 모든 것이 하나요 같다는 것이다.
  이어서 반야심경은 가르치기를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라고 합니다. 이를 번역하면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하는 것입니다. 이를 해석해보면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다른 말로 하면 있는 것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아니하고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고 그러므로 보이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요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나 마음속의 생각과 의식이 이와 같이 항상 없는 것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이는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같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같으니 행동하고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그 내용자체가 근본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며 이를 그렇다고 느끼고 일체의 것이 없음을 알면 그것이 곧바로 도에 이르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이는 원칙이 없습니다.
 
18) 불교의 핵심교리는 따지지 말고 마음에 좋을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분별하지 말고 따지지 말고 그것이 그것이고 그것이 그것이니 그저 일체의 것이 허무한 것이요 없는 것인 줄 알아서 자기의 마음 편하면 그것이 제일이요 모든 마음의 고통은 분별하고 집착하는 데서 오는 것이니 놔버리고 일체의 것은 허무한 것이요 없는 것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며 불교의 교리는 이 원칙을 바탕으로 하여 이것을 입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체의 교리를 진행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가는데 쓰는 가장 큰 무기는 사람중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편하고 좋으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번뇌 고민이 많은 곳이라 하고 이곳을 피하여 깊은 산속에 들어가며 머리를 깎고 세상의 모든 것을 끊기 위한 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마귀가 편한 느낌을 주고 그렇게 열심히 할수록 더욱 마귀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인정을 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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