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누구나 감정이 있습니다. 감정에 의해서 기뻐하고 슬퍼하며 불안해하고 평안해 합니다. 사람의 감정에 고장이 생기면 감정이 메마르게 되고 비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가지고 있으나 감정은 유사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공통점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이에 대해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점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의 내용은 각기 다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욕심이 많은 사람은 남들이 보기에는 좋아 보이는데 그 자신을 자기의 삶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여기고 불평하며 짜증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남이 하찮게 여기고 돌아보지도 않는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감격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조사기관에서 세계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조사했는데 행복지수가 제일 높은 곳이 부탄이고 우리나라는 102위 미국은 150위라고 합니다. 이것은 조사기관이 어떠한 특별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 의해서 볼 때 나타난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삶이야 어떠하든지 부자나 가난하거나 선진국이나 후진국을 따지지 않고 매우 간단한 질문“당신은 행복합니까? 불만은 없습니까?”등의 단순한 질문에 대하여 얼마나 긍정적인 대답을 한 사람이 많으냐에 따라서 정해진 순위로서 만일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부탄에 살게 하면서 행복 하느냐고 묻는다면 부탄이 행복지수 꼴찌 국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원리를 적용해 볼 때에 행복과 불행에 대한 느낌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행복과 불행에 대한 뿌리가 어떻게 심어졌느냐에 따라서 다른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민주주의 체제하에 살면서 박정희를 유신독재라고 비판하고 김일성 일가는 3대 세습독재를 하고 수많은 정치범을 수용소에 가두고 재판 없이 권력자의 명령으로 처형을 해도 김일성이가 좋다는 사람들이 일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너무나 다른 감정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곧 감정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요 그 마음속에 어떠한 생각이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이는 나무에 따라서 그 나무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정의 뿌리인 마음속의 생각을 바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내가 좋으면 그것이 좋았는데 예수 믿은 후에는 예수님이 좋아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15:1)”